카테고리 없음

시대의 얼굴 후기

낑깡9 2021. 12. 6. 22:00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 <시대의 얼굴>
리뷰를 써야지, 써야지 하고 미루다 거의 반 년이 지났다.

이 전시는 영국 국립초상화박물관의 작품을 빌려서 전시한 것이다. 전시관은 총 5군데로 나뉜다.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 나는 관상 보는 재미로 다녔다. 이런 업적을 이룬 사람은 이런 인상이구나. BIAF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찍어온 사진 수는 비등비등하다. 이게 큐레이터의 힘인가.
감상했던 순서대로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적어둔다.

1. 명성

초상화박물관에서 처음 수집했던 건 권력자가 아니라 유명인의 초상화라고 한다. 처음엔 의아했다. 소중히 모아 보존해야 할 건 권력자의 초상화가 아닌가?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납득했다. 박물관은 민간에 개방된 장소이고 초상화는 모두의 구경거리다. 박물관 담당자가 누구든 월급 주는 사람의 얼굴을 구경거리 삼을 순 없었겠지. 자신의 얼굴 옆에 이력을 써 붙인 그림들을 보며 내가 인사 담당자나 면접관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게 바로 초이스 권력인걸까. 초상화는 합법적으로 사람을 박제하는 방법이다. 뮤즈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변태 아닐까.

딜런 토머스

밤의 어둠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 노년은 날이 저물 때 타올라야 하고 열변을 토해야 한다. 빛의 소멸에 분노하고 분노하라.

찰스 디킨스

[픽윅 클럽 여행기],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위대한 유산]의 작가. 나는 놀랍게도 넷 중 하나도 안 읽어서 이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다른 초상화들은 사람을 화면에 가득 채우고 배경은 적당히 뭉개는데, 이 그림은 배경과 빛의 비중이 커서 신기했다. 디킨스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초상화를 남겼을까? 팬심 가득한 스틸컷 같은데.

2. 권력

엘리자베스 1세

권력관의 초입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장식한다. 이 그림은 여왕이 제후들에게 보낸 정치적 메세지인데 색과 장식 하나하나에 함의가 있다. 검정과 흰색은 여왕의 처녀성이고, 펜던트는 불사고, 장미는 튜더 왕조고... X레이 판독 결과 여왕의 눈 위치를 높여 그린 흔적이 있다. 여성의 얼굴은 남자보다 비율이 일정한 편이라(이마-눈-코-턱 1:1:1) 약간 뒤틀어서 더 남성적인 얼굴을 연출한 것 같다.

좌천된 왕자

지지 세력을 모으고 유지하기 위해 권력자의 상징들을 둘렀다고. 이 그림 옆으로 진짜 권력자였던 찰스 1세와 올리버 크롬웰의 수수한 그림이 있어서 아주 웃겼다. 그림 크기도 이 공갈빵이 2배 이상 크다. 그림이 전하는 메세지는 이렇다.

공갈빵: 진짜 왕자니까 지지해달라
크롬웰: 강직하고 청렴한 컨셉이지만 권력자니까 기어오르지 마라
찰스 1세: 나는 온화하다(해치치 마세요)

윌리엄 윌버포스

18세기 정치가. 노예무역과 노예제 폐지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이 그림은 윌버포스가 침대에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릴 때의 모습. 얼굴에서 선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서 찍어왔다.

좌)넬슨 만델라, 우)마거릿 대처

넬슨 만델라는 인권운동으로 유명해서 마냥 선한 인상일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남의 인권운동 한 사람이랑 본인 인권투쟁한 사람의 얼굴은 다른 법이지.
마거릿 대처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 때문에 좌)넬슨 만델라같은 표정이리라고 생각했다. CEO같네. 저건 대처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직접 고른 거라고.

여성 화가의 자화상. 남성 중심이었던 예술계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그래도 앞서 나왔던 권력자들보다는 기가 약해 보인다. 나의 편견일까.

애나 윈터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델. 패션계의 최고 권력자. 나도 알 정도로 패션계에서 유명한 사람인데 바로 옆의 <명성>관이 아니라 <권력> 관에 전시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도 에드 시런도 <명성>관에 있건만. 권력이 최고다.

3. 사랑과 상실

유명인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닌 사람들의 생활 초상화. 가족 초상화와 연인 초상화 등등.

엘리자베스 공주(찰스 1세의 누나)의 초상화에 붙은 설명이 인상깊었다.
"14세의 엘리자베스를 그린 이 초상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점은 보석으로 치장한 공주의 화려한 옷차림이다. ...그녀가 부유하고 아름다운 신부 후보로서 자격을 갖추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똑같이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옷은 '나라와 결혼함' '영원한 군주' '왕실의 리더'라는 뜻이었다. 그런 의도로 그린걸까 해석하기 나름인걸까.

4. 혁신

초상화의 변천사를 그리고 있다. 사진이 보급되며 초상화도 보편화된 것, 초상화를 정밀한 인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예술작품으로 남긴 것, 전기를 이용한 홀로그램 초상화 등등.
예술에는 제작자의 해석이 다량 들어간다. 혁신관에서 본 일부 초상화들은 관객에게 평가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을 남긴 것 같았다. 선을 뭉갠 에드 시런의 초상화나 면을 단순화한 애나 윈터의 초상화도 그런 면이 있지만, 표정 없는 황금 머리통은 너무 방어적이다. 내가 현대미술에 조예가 있었으면 그런대로 즐겼을지 모르지. 업적과 관상 비교하며 관람 중이었어서 흐름이 끊긴 느낌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델

귀엽다.

5. 정체성과 자화상

헨리 리

엘리자베스 1세의 충성스러운 신하. 쿠앤크 의상은 여왕의 색이고, 팔뚝에 묶은 반지는 여왕의 상징이고, 엄지에 묶은 끈은 여왕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낸다고 한다. 야해! 똑같은 상징으로 칭칭 감았어도 여왕은 넘버 원 권력자고 헨리 리는 여왕의 신하라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분류된다는 거죠. 여왕이 저렇게 그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스페인 궁정화가가 여행중인 헨리 리를 그린 거라는데, 무슨..생각으로 저런 복장으로 초상화를 남기겠다고 생각했는지..? 여기 5권짜리 로맨스소설 하나 있어요!

글럭

글럭 프레임의 창시자. 자화상. 제 5관의 구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중요한 인물처럼 배치되어 있어서 찍어왔다.

좌)래드클리프 홀, 우)슈발리에 데옹

좌)레즈비언, 우)트랜스젠더. 나란히 걸려 있는 게 재밌었다.

브론테 자매

왼쪽에서부터 앤, 에밀리, 샬럿 브론테. 필명은 각각 액턴, 엘리스, 커러 벨. 대표작은 <애그니스 그레이>,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자매의 남자 동기인 브란웰이 17세 때 그리고, 접어서 찬장에 넣어놨던 그림이라고 한다.

조슈아 레이놀즈

빌어먹을, 어쩜 그리 재주도 많은지!
-레이놀즈 최대의 라이벌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말
저 감탄사가 이 그림을 살렸다. 조슈아 레이놀즈는 화가로, 이 그림은 작업 중인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게인즈버러는 어쩜 칭찬을 저렇게 하지?